광복 65주년을 맞으며
친애하는 베트남전 참전 전우여러분,
세계적인 이상기온의 여파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도 전례 없는 폭염으로 온 국민들이 여름나기에 무척 고생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전우님들도 예외가 아니었을 걸로 생각하면서 그동안 전우여러분 모두가 건강들하시고 가내 평안하셨으리라 믿습니다.
나 역시 모든 참전 전우님들의 염려덕분에 이미 산수(傘壽)를 넘은 노병이지만 아주 정정한 체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원기의 원동력은 역시 지난 40 여 년 전 여러분과 내가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베트남 전쟁터에서 갈고 닦았던 무인으로서의 체력과 정신력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베트남전 참전 전우 여러분, 아마도 대부분의 우리 전우여러분들은 당시 어린나이였기 때문에 우리민족이 일제 식민지치하에서 겪었던 36년이란 질곡의 굴레를 벗어던진 해방이라는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는 환희의 기쁨을 잘 모르실 줄 압니다.
본인은 당시 19세의 혈기왕성한 청년의 몸이었기에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그날 삼천리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지는 만세소리의 포효를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야말로 희망에 찬 자주독립의 여명이 밝아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가 태여 났던 북한 땅에는 이미 공산괴뢰정권이 태동하게 되면서 우리민족은 끝내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북의 공산 괴뢰정권이 저지른 동족상잔으로 인한 처절한 아픔을 참아오며 살아 온 것이 벌써 65년의 성상이 지나가버렸습니다.
친애하는 전우여러분, 나는 원래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북에서 시작된 공산당의 학정을 하나들 체험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무한한 꿈이 보이는 남쪽 대한민국으로 내려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애국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군인이 되고자 과감히 무인(武人)의 길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일지기 1948년에 발생했던 제주4.3폭동의 진압군 소대장임무를 수행하면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채택한 신생 대한민국을 굳건히 지키기 위하여 나의 총력을 바치기 시작했습니다. 동족상잔 6.25때에는 백골병단 지휘관으로서 조국의 산하를 구석구석 누비며 그야말로 생사의 갈림길에 섰던 일이 이루 헤아리지 못 할 정도입니다. 연이어 나는 내 자신 군인으로서 남다른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주 월 한국군 초대 사령관직을 수행하게 된 것입니다.
전우 여러분, 말이 나온 김에 동족상잔 6.25와 우리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하여 몇 가지 더 첨언하고 다음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 공산 집단으로부터 불시의 침략을 받은 우리대한민국은 단 3일 만에 전방의 아군 전투부대가 모두 격파되고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기고 남은 건 절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코리아가 어디에 붙어있는 나라인지조차 몰랐던 미국이 조그만 나라 대한민국의 자유 수호를 위하여 급히 한국에 엄청난 군대와 전쟁 물자를 지원하여 결국 우리를 기사회생 시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맥락에서 우리우방 미국의 은혜를 절대로또 영원히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베트남전에 파병된 동기는 우선 자유월남 정부와 당시 그 나라 안에 만연한 부패 때문에 실은 우리의 파병의 의미가 별로 승산은 없어보였지만 미국이라는 혈맹이 당시 베트남 전쟁터에서 부족한 전투 병력을 한국에 주둔하던 미 보병사단을 이동 배치시키려는 기미가보여 우선 우리대한민국의 안보를 위하여 우리들이 서둘러 파병되게 되었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파병 후에도 우리 주 월 한국군은 미국과의 독자 작전권 수행 문제를 놓고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결국우리가 원하는 대로 미국 측이 양보하여 우리 한국군은 명실공이 세계 여러 나라가 찬사를 아끼지 않는 용맹스러운 군대로 이름을 날 닐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우여러분, 근 반세기전 1952년 어느 날 발간된 영국의 런던 타임즈는 그들의 기사에서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한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길 기대하는 것과 같다" 란 혹평을 한바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14년 후인 1966.4.29일자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반된 기사를 썼습니다.
"만일 한국군이 베트남 전 지역의 평정 책임을 갖고 있었거나
미군들이 한국군이 전개한 "고보이(Go Boi) 작전"에 대한 교훈을 얻었더라면 베트남전은 이미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칠 흙 같은 어둠속을 96키로나 자동차로 달려도
단 한 번의 적의 총격이나 매복공격의 기도를 발견할 수 없었다.
베트남 전 지역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은 작전을 수행할 자는 한국군 이외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친애하는 참전 전우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아시지만 고보이 작전은 우리 맹호부대가 주둔했던 퀴논 인근 고보이 평야지대에서 우리한국군이 그곳에 영구 댐을 건설해줌으로서 이모작만을 해오던 주민들로 하여금 연간 삼모작이 가능하게 해줬던 성공적인 우리의 대민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한국군의 독자적 중대전술기지 개념에 의한 고보이 작전은 그 후 우리 한국군의 확고부동한 작전개념으로 자릴 잡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작전개념으로 대승을 거둔 두코 전투나 우리 청룡부대가 짜빈동 전투에서 쟁취한 혁혁한 전공은 전 세계인 들에게 한국군의 용맹성을 과시했을 뿐 아니라 당시 그러한 한국군의 연전연승 소식을 듣고 한국을 찾아온 국제 금융 협력 단을 감동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따라서 국민소득 $100밖에 안되었던 대한민국이 그 이후 국제 금융 협력단으로부터 27억 달러에 이르는 차관을 공여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국가적 유무형의 수혜혜택은 바로 우리 베트남전 참전 전우여러분들의 피와 땀의 결과에 기인했다는 사실을 재차 강조하는 것입니다.
친애하는 전우여러분 세상 사람들이 지나간 과거를 소중한 추억으로 소회하고 또 간직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그러한 감정이 있음은 전우여러분들과 별반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허 구 헌 날 전투에 임해야 했던 여러분들은 더 많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순간들을 경험 했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당시 여러분들의 사령관이었던 나 자신도 길거리에서 평범하게 바나나 파는 어린 게집 아이가 던진 수류탄 공격에, 사이공공관에 가해진 베트콩들의 로켓트포 공격, 또 내가 탄 헬리콥터에 대한 공격 등등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일이 새삼 어제 일처럼 떠오릅니다. 그래서 여러분과 나는 여타의 일반인들이 맛 볼 수 없는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전쟁경험이 있다는 것이 큰 공통점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우여러분, 나는 분명히 기억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중에 적의 기습공격으로 만신창이가 된 전투현장에서 이리떼 같은 적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승전 보고를 하던 여러분들의 등을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격려하던 일, 여러분 가슴에 무훈훈장을 달아 주던 일 또 잠시 귀국하여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하며 먼저 와서 누워있는 사랑하던 부하들의 끝없이 늘어선 묘비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훔치던 일 등등의 기억들을 말입니다.
친애하는 참전 전우 여러분,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게시고 또 내 자신이 많은 언론 매체들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초지일관 무인(武人)으로 시작하여 무인으로 끝날 것임이 나의 변함없는 신조이었고 또 지금의 각오입니다. 돌아보건대, 군인의 제복을 벗은 뒤 나는 무수히 많은 현실정치로의 입문 요청을 받은바 있습니다. 아주 최근까지도 말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중히 사양했습니다. 이는 욕심이 없음을 반증하는 내개인의 발자취라고 우리 베트남전 참전전우님들에게 감히 자부하며 밝히는 바입니다.
그러나 나도 인간인데 어찌 욕심이 없겠습니까? 내 생전에 꼭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러분 개개인 머리위에 국가유공자란 월계관을 씌워주고 떠나야하는 내 생전에 이뤄야할 최우선순위의 목표이고 욕심인 것입니다. 무슨 행사가 있을 때 마다 이 채명신이 굳은 의지의 표명으로 여러분들의 국가유공자 자격수혜 건을 누누이 거론하고 또 약속해왔습니다. 그러나 너무 시간이 지연되면서 빌 공자 공약(空約)이 된 느낌이 들어 송구한맘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전우여러분, 지금은 내가 군복을 입고 있던 당시의 빠른 하의상달과 상의하달이 이뤄질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지 않음을 여러분이나 나나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은물론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은 변화를 감지하게 되는 냉정한 현실입니다.
요즘도 정부 요로의 인사들을 만날 적마다 여러분들의 국가유공자건을 줄기차게 채근하고 있습니다. 관계관들로부터 상당히 진전된 답변을 듣고 있습니다. 전우여러분 이럴수록 우리 다 같이 조금만 더 인내하며 합심 단결하여 우리의 목표를 달성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십시다.
친애하는 전우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 채명신의 그런 중차대한 목적이 달성되기 전에는 아마도 제게 거주지이전 명령을 하달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광복 65주년을 즈음하여 전우여러분들께 안부 겸 몇 마디 첨언했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고 가내 평안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10.8.15
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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