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晩書 작성일 : 2018-02-19 조회수 : 252
백조의 노래

“여보, 시계가 멈췄어요?”
설날 아침 차례를 준비하던 아내의 목소리가 뾰족하다. 건전지를 교환한 지가 얼마 되지 않은 거실의 벽시계가 멈췄다. 며 할멈이 한마디 한다. 벽시계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즈음은 손목시계도 거추장스럽다고 집에 두고 다닌다. 벽시계가 멈췄다고 시간이 궁금하지도 않을뿐더러, 언제나 분신처럼 들고 다니는 손 전화가 늘 시간을 알려 주는데 굳이 벽시계가 없다고 해서 불편하지도 않다. “그대로 내버려 두구려”뾰족한 아내의 목소리에 퉁명스레 대답해 주었다. “그래도 거실인데 시계가 멈춘 걸 그대로 둬요?”또 한마디 한다. “허허 그 놈의 시계처럼 세월도 멈추라고 하지”“시계가 멈추었다고 세월이 멈추나?”아내는 못내 못 마땅하다는 말투다. 어느 대중가수가 ‘고장 난 벽시계’라는 노래를 했던가. 언제나 느끼는 일이기는 하지만 설날 아침이면 늘 그렇게 세월은 거침없이 가는지, 무정한 세월이 야속하기도 하다. 억겁의 시간을 돌고 돌았던 이 세월은 건전지가 없어도 멈춤도 없고 고장도 없이 잘도 가고 오지 않는가?

지난 한달 동안에 네 번이나 부고를 받고, 장례식장을 드나들었다. 6,70년대쯤이라면 하늘의 부름을 받은 고인들의 나이가 그다지 억울(?)하지 않을 수도 있어 호상(好喪)이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소위 백세시대라는 요즈음의 추세라면 나름대로 조금은 빨리 가셨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아까운 나이다. 더구나 필자와 대비한다면 불과 수년차이이고 또 어느 고인(故人)은 필자보다 젊고 보니 새삼 세월의 흐름이 전광석화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새삼 돌아보지 않아도 어차피 두 번 살고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왔으니 언제라도 하늘의 호출이 있다면 담담하게 늦지 않도록 따라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무엇인지는 몰라도 하나가 빠진 것 같은 허전함 까지 떨칠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미련이라는 것이 남은 탓이리라. 올 때는 순서가 있다고 해도 가는 길엔 순서가 없다니, 인생이 가고 오는 것이 어디 인간의 뜻대로 되는 것인가?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 늦어도 한참 늦게 시작한 만학의 재미에 흠뻑 빠져 다시 다른 과(科)로 편입(編入)을 고려하고 있는데 가까운 지인들이 하나 둘 떠나 갈 때면 도저히 계산 할 수 없는 남은 세월을 계산하며 헤아려보느라고 밤잠을 설친다. 마음을 비웠으니 욕심 없노라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속물(俗物)인간이니 마음먹은 대로 될 수가 있으랴. 한 때 그러니까 만학을 시작해서 스스로 행복에 취해 있을 때, 조용히 몰래 찾아온 암(癌)이라는 친구(?) 때문에 학업을 접을 생각을 했었다.‘내 팔자에 무슨 대학인가?’그조차 하늘이 허락하지 못하겠다면, 입학을 했던 것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찾아온 그와 조용히 함께 가리라고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갈 때 가더라도 하던 일을 중단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더욱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에서 하는 말이지만 그 결정은 참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자칫 포기할 뻔 했던 학업을 우여곡절 끝에 마치고 작품작업에 열중 하면서 다시 다른 과(科)로 편입할 계획을 세웠으니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언제 닥쳐올지 알 수 없는 그날을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스스로를 너무 학대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관리를 위해 특별히 하는 일은 없다 의사의 처방대로 열심히 검사받는 일에 충실할 뿐이다.

아직도 노인(老人)이라는 단어가 실감나지 않고 익숙하지 않아서 듣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체념처럼 인정하기로 했다. 가끔 만나는 옛 전우들과의 인사가 재미있다. “요즈음 술 마셔?”“담배는?”이 두 가지만 물어보면 그의 건강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거다. ‘술 마시고, 흡연한다.’는 것은 그가 건강에 아직 이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나. 어느 전우가 설날 아침 보낸 문자는‘전우님, 우리 끝까지 열심히 흡연 하고 열심히 마십시다.’라고 썼다.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귀천에 상관없이, 부귀와 무관하게 만인이 반드시 가야 하는 길 천하의 영웅(英雄)호걸(豪傑)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었던 길인 것을,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차라리 그 길을 아름다운 꽃길이 되도록 하는 것이 마지막 보람이 아니겠는가? 그 앞에 한없이 초라할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그것을 승화 시킬 수 있는 것은 마지막 떠나는 그 날에 가서 후회 없는 삶이 되도록 하는 것 외에 또 무엇이 있으랴.

백조는 우아하고 품위 있어 새 중의 귀족이지만 노래하지 못한다는 컴풀렉스(complex)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노래하지 못하는 백조는 그러나 일생을 통해 단 한번 죽음 앞에서 노래한다고 하니 죽음은 인간은 물론 한낱 미물까지도, 그 완성에 이르는 마지막 길인지도 모른다. 후회 없이 마지막 노래를 하고 생을 마감하는 백조의 죽음이 더욱 숭고해 보이는 이유다.

나이 60을 이순(耳順)이라고 하여 글자그대로 귀가 순해진다는 뜻이니 ‘옳고 좋은 말을 가려듣고, 혹여 나쁜 말이거나 흉한 말들도 순화시켜 들을 수 있는 나이’라는 뜻으로 새겨 봄직하다. 이순을 넘어 70 줄에 들어서면 세월의 속도는 더욱 가속이 붙어 빠르게 돌아가고, 공자께서는 그 나이가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행(行)하여도 결코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했으니 살아온 세월의 연륜이 규범과 예(禮)를 벗어나지 않는다. 고 늙음을 예찬(禮讚)(?) 했지 않는가? 이제 비록 이 나이가 되어 주어진 나머지 삶을 헤아리며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는 입장이기는 하지만 평생을 살아오면서 축적된 삶의 경험과 지혜(智慧)를 후학들에게 하나라도 남길 수 있다면 그 또한 살아온 보람이 아니겠는가?

설날아침 아이들에게 세배를 받으며 덕담을 나누어 주면서 이 아이들이 늙은 애비의 말들을 어떻게 새겨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말들 중에서 두어 마디라도 가슴에 새겨두기를 이 장문의 글로 기대해 보며,,,,,,.

무술년 원단에
김경만  2018/02/20 09:53:20 [답글] 수정 삭제
죽음이 새로운 만남을 예고하는 것으로 생각해야합니다. 하지만 요즘 말대로 인생백년에
짧은 생을 뒤로하고 떠나는 전우님들을 보면 허망하기만합니다. 무엇이 그리 급해 떠나시는지요. 한번 태어나서 한번 떠나는 진리에 순응하는 것이지만 나 자신도 그런 경우를 겪겠지요.일제에서 해방의 기쁨도 잠시 6,25란 크나큰 슬픔을 겪고 온갖 고생고생만하다 좋은 세상 보지도 못하고 늙어만 가는 우리 자신들이 가엽게만 생각됩니다.
만서 전우님 좋은 글 감사하고 계속 건필을 부탁드립니다. 올 한해도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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